해브투 뉴스는 ‘다함께 행복하자’(HaveTo Single Happiness)라는 슬로건을 토대로 우리 모두의 목표인 ‘행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행복EASY는 “이런 것이 행복이지, 행복은 쉽지” 라는 콘셉트로 다양한 전문가를 비롯해, 한부모들의 삶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행복은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입니다. (편집자의 주) *한부모 인터뷰 경우, 실제 사례를 통해 각색과 가명을 써야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내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가장 걱정입니다”
법적으로 A씨(여, 52세)는 한부모 가정은 아닙니다. 아이 둘을 이혼한 전 남편이 양육을 하고 있어서입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A씨의 큰 아들은 엄마를 찾아오겠다면서 먼저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여전히 엄마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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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해브투뉴스 |
다정다감했던 전 남편
제가 전 남편과 이혼한지는 벌써 12년 여 되어 갑니다. 슬하에 아이만 둘을 낳았죠. 당시 시부모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며느리였습니다. 그 만큼 저도 남편과 시부모님께 정성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전 남편은 사업가였습니다. 적극적인 구애에 못 이겨 덜컥 결혼을 했습니다. 키도 크고 훤칠한 외모에 어느 정도의 재력도 갖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큰 아이를 낳고 약 10년 만에 둘째도 낳았습니다. 금술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겐 아주 다정다감한 그런 아빠였죠.
저의 친척들이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방문할 때면, 집 마당, 이웃집을 돌아다니면 제철 과일을 맛보게 하느라 정신없었던 그런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큰 아이 역시 어린 동생을 잘 보살펴 주는 형이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가며 아이들과 여행도 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행복한 가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도 집도 순식간에 사라져
어느 순간부터 일까요? 전 남편의 사업이 조금씩 힘들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로 기억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경제적 지원이 없이 벌어 둔 돈만 까먹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을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 조차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주변 식당을 다니며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를 태우고 다녔던 차가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어렵다는 핑계로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전 남편은 차를 팔아 버렸습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비록 저희가 살고 있는 둥지는 비록 큰 집은 아니었지만, 마당도 넓고 그 지역에선 꽤 값어치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도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담보가 잡혔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전 남편은 사업을 했기에 사업가끼리 개인적 채무라 여겼습니다.
곧 갚을 수 있다는 남편을 믿었고, 저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편의 어깨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지쳐만 갔습니다.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붙어 있는 빨간 딱지 보신 적 있나요? 아이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막내는 울기만 했습니다. 정말 처참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남편을 대신해 보증까지 서줬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도박’ 이었다는 것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사실 일리 없다고 부정했습니다. 그 사이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들어맞았습니다.
원래 남편의 사업은 순탄하게 잘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술자리와 사업을 핑계로 접근한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저도 여기까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로 인해 도박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사채를 쓰고, 차를 담보로 잡히고, 집도 잡혔지만 모두 날려버린 것이죠.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겐 손찌검을 해댔습니다. 남편은 점점 폭력적이고 무능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은 다음날이면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었죠. 이것이 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혼 만큼은 싫었습니다. 잘못을 빈 남편의 사정에 마음을 접었던 것이죠.
막내야 미안해
이렇게 모든 것이 해결됐다 믿었고, 다시 시작해 보자 생각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전 남편은 그 새를 못 참고 또 다시 도박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번엔 제가 서준 보증 때문에 제 발목이 잡혔습니다.
남편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네 빚은 네가 갚아라’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정말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을 보며 참았습니다. 이혼 자녀라는 딱지를 붙여 줄 수 없었기에 참고 또 참았는데, 너무나도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말과 행동에 더 이상 함께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큰 아이는 저를 이해해줬습니다. 하지만 어린 막내는 이런 제 모습이 낯설었나 봅니다. 저는 당장 이혼 서류를 꾸려 법원으로 향했습니다. 내 생각만큼 이혼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분과 살 곳도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빈손으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았던 전 남편이 양육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천청벽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전 빈 손으로 쫓겨났습니다.
사랑한다, 그리고 보고 싶다
어느덧 이혼하고도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큰 아들은 제대 후 다시 학교로 복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와도 연락을 자주하면서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헤어질 당시 너무 어려 제 상황을 모를 테지요. 그래도 이번 설 만큼은 저도 긴장되고 기대됩니다. 큰 아들이 동생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다고 합니다. 얼마나 컸을지 또,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저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잊지 않습니다. “사랑한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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